분별력이 내게 자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책의 세계에도 가야 될 길과 그냥 걸어가면 수렁으로 빠져 드는 허방이 존재하고 있었다. 내겐 그 길을 판별하여 볼 수 있는 시력이 갖춰진 것이었다. 그로부터 나는 한 권의 책을 사고자 하는 데 보다 신중해지기 시작하였다.
책 목록 살피기
전에는 무턱대고 책방에 들어가 서가의 책 중에서 아무 것이나 집어들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먼저 내가 읽어야 할 책들, 읽고 싶은 책들의 목록을 만들었다. 책방에 들어서서 눈길이 닿는 책이 있어도 우선 서문이나 후기를 꼼꼼히 읽어 치운 다음 차례를 살피고, 본문의 몇 줄이라도 읽어 본 연후에야 책의 구입 여부를 결정짓게 된 것이다. 읽을 책을 고르는 방법의 하나로, 나는 가끔 도서관을 이용하곤 했다. 도서관의 목록함에는 내게 필요한 책들의 이름이 가득차 있었다. 나는 그 목록들 속에서 내게 유익한 책들의 목록을 수첩에 옮겨 적곤 하였다.
인생책 만나기
그때나 지금이나 도서관 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나는 도서관을 정보 자료 제공처로만 이용했던 것이다. 그무렵 나는 내 생애에 있어 이제까지 잊을 수 없는 두 권의 책과 만났다. 그것은 아마 15,6세 때였을 것이다. 나는 어떤 책방에서 『장자』와 『한비자를 만났다. 그것은 한자로 되어 있는 책과, 일본어 번역판이었다. 한문 공부를 따로이 하지 못했던 나로서는 장님 파밭 들어가는 격이었지만, 일본어 번역판에 의지해 한두 줄씩 읽어내는 성취감은 흔쾌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나는 마치 불가해한 비밀결사의 주인공처럼 남몰래 그것을 읽고 또 읽어 나갔다. 어차피 이되면서 나는 이윽고 한 권 두 권 책을 사모으는 두 번째 단계로 접어들었다. 자신의 책을 갖는 기쁨, 그것은 어쩌면 정복자가 새로운 식민지를 소유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한 권의 책 읽기
그 새로운 지식의 영토에 나 자신의 정신의 발자취를 남길 수 있는 기쁨,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미지의 인물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자긍심은 실로 내 영혼의 성숙에 가속도를 갖게 하는 것이었다. 책에 빠져 든다는 것은 마치 꿀단지에 빠지는 줄도 모르고 덤벼드는 꿀벌과 같은 것이었다. 아니 폭풍과 같은 격랑과 같은 것이었다. 한 권의 책을 구입해 읽고 나면 다시 눈에 띄는 또 한 권의 책으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남독이 지적인 허갈을 어느 정도 메울 만큼 되면서 어느새 나는 자신도 모르는 어떤 힘에 떠밀려 미로의 출구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분별력이 내게 자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책의 세계에도 가야 될 길과 그냥 걸어가면 수렁으로 빠져 드는 허방이 존재하고 있었다. 내겐 그 길을 판별하여 볼 수 있는 시력이 갖춰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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